Date: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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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을 살리는 협동조합 열린강좌’ 제3강이 지난 9월 7일(토) 오후 2시 평택시립안중도서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3강에서는 옥천살림의 권단 선생님이 “협동조합은 무엇으로 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강의를 위해 권단 선생님이 작성한 자료집용 기고글입니다.  강의를 녹음한 파일과 전문(녹취록)도 홈페이지에서 곧 만나실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 강좌와 관련된 자세한 안내와 신청은 다음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 <지역을 살리는 협동조합 열린강좌> 안내

• <협동조합 열린강좌> 1강 스케치 바로 가기

• <협동조합 열린강좌> 2강 하승우 “협동조합,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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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협동입니까?

지금에 와서 왜 협동입니까?

개별화되고 분절화된 세상에서 우리 삶의 울타리란 벌써 일찌감치 허물어진지 오래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일궈놓은 공유된 역사와 터전 없이 체제가 구획해놓은 구역과 틀거리 안에서 아둥바둥 살아왔던 것이 일제 강점기 이후 식민시대의 교육이 지금까지 변형되어 전이되어 오지 않았던가 싶은 것입니다. 몬 살던 시대 경제발전이다 뭐다 하면서 체제와 자본이 한몸뚱아리를 섞어가면서 밀월을 누리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더 팍팍해졌지요.

 일등과 일류, 그렇게 서열화된 기억들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지요.

바로 이웃을, 옆자리에 앉은 친구를 제껴야 할 사람으로, 딛고 일어서야 할 사람으로 그렇게 우뚝 서서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것이 바로 승자라고, 삶자체가 인정사정 볼 것 없는 냉혹한 정글 아니겠냐고 우리는 그렇게 배우고 자랐지요. 여태 몰랐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남을 밟고 일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리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의 서열화는 너무도 간단히 점수로 획일화되었고 졸업하고 나면은 급여 통장에 찍힌 액수와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군림하고 사느냐 네 밑에 몇 사람이 있느냐의 숫자로 획일화되며 평가되었지요. 지금도 그러한가요?

 경쟁하지 않으면 뒤떨어진다고 누가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경쟁해야 발전한다고, 선의의 경쟁이란 것이 있는 것이라고. 그리 말했지요.

 경쟁은 이미 변질됐습니다. 공통의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잘난 놈이 살아남는 거다. 뛰어난 놈 몇몇을 추려 우리의 삶을 영도해줄 것이다라는 것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지요.

경쟁은 수직입니다. 아주 꼿꼿한 수직입니다. 경쟁에 낙오되는 사람들이 밑바닥을 떠받치고 피라미드처럼 가장 위의 꼭지점이 진두지휘를 하며 아래로 명령과 지침을 하달해 일사불란하게 움직거리는 다단계입니다. 과연 발전했습니까? 무엇을 위한 발전이었나요?

 발전해서 행복합니까? 과연 풍요로워졌습니까? 끝간데 없는 무한 성장, 발전의 논리에는 경쟁의 원리가 숨겨져 있지요. 종착점이 없습니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합니다. 탈주가 아니라 목적지가 없이 그냥 내달리는 것입니다. 그악한 포식성으로 모든 것을 집어 삼킵니다. 관계가 부서지고 먹이 사슬이 되어버렸지요. 갑을병정이란 먹이사슬로 모두들 퍽이나 아름다운 기회균등의 땅에서 슈퍼 갑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지요. 찌질한 것들이 불평불만이 많다고 그 옛날 불령선인처럼 감시하고 적당히 떡고물 나눠주며 길들이려 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아주 음험합니다.

가정 교육, 제도 교육부터 미디어 교육까지 아예 숨쉴 틈없이 우리를 경쟁의 카테고리 안으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학교 안에서 집집마다 안방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테레비와 컴퓨터 안에서 경쟁의 귀신들이 또아리를 틀고 세뇌를 시킵니다.

모두가 잘 산다는 것은 허무 맥랑한 소리지. 공산주의적인 발상이지.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능력있는 사람들이 더 가져간다는 게 뭐가 나빠. 노력하지 않은자 먹지도 말아야지. 공부하지 않은자 힘들게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냐? 저 사람은 학교 공부도 안 하고 부모님 말도 안 듣고 해서 저렇게 못 사는 거야. 너도 나중에 저렇게 될래. 저런 사람 안 되려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이런 말들이 무슨 입버릇처럼 스스럼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공포를 조장하는 국가가, 돈으로만 움직거리는 시장이 삶을 불안하게 하며 몸과 마음을 가지껏 수탈하고 있습니다.

당장 일을 멈춰버리면 내 삶이 순식간에 동강이 나고 갉아먹어버려 만신창이가 날 정도로 이젠 일을 멈출 수도 없습니다. 자발성과 자율성은 어디로 증발되어 버리고 어느새 거대한 공장의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따박따박 월급통장에 들어와서 일용한 양식을 먹고 하루하루를 건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지요. 그런 시스템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은 대체 어디에 가 있어야 하나요? 몽땅 시설에 모아서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들은 사회부적응자라 격리 수용을 해야하는 것인가요? 사회, 사회 하는데 우리가 모여 스스로 만든 사회라는 게 있는 건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국가체제의 자본 시장이 기획해놓은 시스템의 부적응자이지요. 우리가 만든 사회라는게 있습니까?

 끊어진 관계에서는 모두가 타인이고 적이 됩니다.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제껴야 할, 밟고 일어서야 할 사람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작금의 상황에서 협동을 말합니다. 어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이야기인가요.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이미 박제된 채로 이솝우화나 동화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무신 일인가요?

 이거 희롱하는 건가? 우롱하는 건가 싶을 것입니다. 자조, 근면, 협동이란 말을 귀에 딱지 앉게 외우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면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조와 협동이라 말은 얼마나 숭고한 말입니끼?

 스스로 돕는다. 그리고 함께 일한다. 알흠다운 말들이지요. 협동은 혼자할 수 없는 것이지요. 같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경쟁은 혼자하거나 혼자가 확장되어 패거리지어 무던히도 남을 제끼면서 우뚝 서려는 성질이 있는 반면에 협동은 같이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하는 것입니다. 모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구분짓지 않고 소외시키거나 배제하지 않고 모두 함께 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데 협동을 할 수 있나요? 잘 알지도 못하는 데 협동을 할 수 있나요? 협동이란 말에는 신뢰와 믿음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을 다 내어줄만큼 기꺼운 사이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그럴려면 일뿐만 아이라 삶까지 같이 공유하고 있다면 더 돈독해질 것입니다.

 삶을 공유한다. 참 어려운 말이지요. 어떻게 삶을 공유해. 일하기도 바쁜데 집에서는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 쉬고 싶은데, 일하면서도 관계의 피로도가 급상승해서 집에서는 아무도 안 만나고 싶은데, 괜히 잘못 엮이면 싸우고 다투고 어색해지고 이사가야 하는데. 더 피곤해지는 거 아냐.

 사적인 삶이 있는데 그 삶까지 같이 나누고 싶지는 않아. 그냥 혼자 있고 싶어. 익명으로 살고 싶을 때도 있는 거지 뭐.

 삶터는 그래서 피폐해졌습니다. 시장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돈이 삶을 좌지우지 하면서 일터의 비중도 덩달아 높아졌습니다. 삶터는 그야말로 배드타운으로 전락한지 오래지요. 삶터에서 서로 모여 의견을 나누는 공간도 시간도 모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 반상회나 마을회의는 박물관에서나 만날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반상회 한번 하신 적 있으신가요? 마을 회의가 정기적으로 있기나 하는건가요?

 우리의 삶터의 관계는 그렇게 헝클어지고 엉켜있습니다.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협동이 있을 수 있나요? 물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그런 관계속에 협동할 수 있지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세상이라도 모든 관계가 그렇게 끊쳐지기야 했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지옥이지요. 그나마 인간사 아직 정이 살아있고 의리가 남아있기 때문에 여적지 이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여기서 협동을 한번 이야기해볼까요?

협동이 뭘 하자는 이야기일까요? 어렵고 퍽퍽한 삶 같이 이겨내보자는 것입니다. 따로국밥으로 따로 놀지 말고 같이 해보자는 것입니다. 협동은 수평입니다. 둥그렇고 평평한 수평입니다. 잘난 놈만 잘 사는 게 아니라 잘하고 못하고 구분없이 모두의 이름으로 같이 하자는 것이지요. 소외됨과 배제됨 없이 한 몸뚱아리로 가자는 것이지요. 어디서 어떻게 협동을 해야 하나요?

 우리의 삶을 건사하려면 자주 얼굴 보는 삶터에서 협동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퍽퍽한 우리 삶에 윤활유라도 칠 요량이라면 자주 보는 공간에서 협동을 이야기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협동이란 말이 담고 있는 함의에는 순환과 공생이란 말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순환이란 자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데 자연을 위해하는 것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이지요. 자연 속에서 더불어 협업하며 순환하자는 것이지요. 공생이라는 것은 사람 가리지 말고 모두와 함께 협동하자는 것이지요. 열려 있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협동에 조합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왠지 폐쇄적인 것 같습니다. 조합원만 혜택을 보고 조합원 끼리만 논의를 하는 그런 것 같아 왠지 패거리 냄새가 나지요? 어찌보면 조합이란 글자가 붙은 것은 미리 먼저 마음을 모은 사람이 현실적으로 딛고 일어설 토대이지요. 그 토대가 그들끼리만 협동해 잘 살자 이런 토대라면 그것은 협동의 의미를 단단히 오해하고 잘못 실행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이지요. 그 함의 그대로 순환과 공생, 더불어 모두가 사는 그런 시상을 만들기 위한 토대 아니겄습니까? 열려 있으니까 오든지 말든지가 아니라 낮은 자세로 더 다가가야지요. 마음의 문을 무던히 두드려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을까 수없이 타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협동이라 생각합니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있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하는 것을 협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단히 오독하는 것이지요. 협동은 삶터 안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같이 돕고 돕는 것입니다. 자조와 협동은 양 수레바퀴처럼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지요.

 서로 일으켜 세워주는 게 사람 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자치와 자급이 서서히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왜곡하여 놓은 인위적인 일상에 우리는 놓여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오래되다 보니까 만연되다 보니까 아무렇지 않게 인지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널 뛰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생략의 공간을 묵상해주십시요. 협동은 결국 자치와 자급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자치와 자급이란 그동안 국가 체제와 자본 시장이 왜곡해 놓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찾아 오는 것입니다. 흙에 기반한, 자연에 기반해 우리가 스스로 모여 만든 사회를 되찾아 오는 것입니다.

 체제가 구획해 놓은 행정구역, 통치구역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설정한 자치구역을 찾아내십시요.

시장이 설정해 놓은 목 좋은 곳, 돈 잘벌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를 돕는 호혜시장을 만드십시요.

 빼앗긴 광장과 시장을 되찾아와야 합니다.

침략과 수탈의 역사에서 이젠 벗어나야 합니다.

 길고긴 터널 속에 툭하니 화두가 하나 던져졌습니다.

 악의 무리들은 그것마저 재해석하여 자기네 것으로 갈무리하려 합니다.

손을 대면 댈 수록 그들은 마이더스, 마이너스의 손을 가져 모든 것을 그들의 모가치로 탈바꿈시킵니다.

 이제 우리가 지켜내야 합니다.

바로 살 부대끼며 사는 곳에서 얼굴을 자주 보는 곳에서

손을 내밀고 마음을 건네십시요.

새로운 관계가 구축될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축적될 것입니다.

모두가 살아 움직거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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